시청: 2022.5.12. / Netflix


한때 핫했던 돈룩업을 넷플릭스에서 커버만 구경하다 드디어 보았다. 종말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소통에 대한 영화였다. 또는 소통의 불능은 종말로 이어진다는 메세지를 담은 영화였다.

이 사회는 모든 것이 debatable하다.
사람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감정적이다. 감정이 없다면 사람은 그 어떤 판단도 (앞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할지 말지의 결정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감정의 존재는 우리의 인지적 효율성을 높여준다. 동시에 우리의 이러한 본성은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게 한다. 하지만 나의 감정적, 인지적 편향에도 불구하고 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고, 지금까지의 진보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돈 룩 업의 사회는 자신이 감정적으로 밀착되어 있는 사람이나 집단의 의견이 아니라면 사실로 취급하지 않는다. 과연 무엇이 진실에 가까운지 알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토론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다. 진보할 것은 이미 다 진보해서 더 이상 진리는 필요 없는 모양이다. '진보'는 객관적으로 더 나은 상태가 있다고 상정해야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모든 상태가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면 진보는 성립할 수 없다.

돈 룩 업의 사회에서는 인류를 살리기 위한 보다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다. 모든 의견과 상태가 동일한 지지를 얻기 때문에 보다 나은 방향이 무엇인지 도저히 공감대를 만들 수 없고, 그러다보니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을 내딛을 수 없다. 그럼 남은 것은 인류의 생존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 인류의 멸망을 맞는 것일 뿐이다.

BASH의 오너인 피터 이셔웰은 그의 프로그램이 유저가 어떻게 죽게 될지 높은 정확도로 예측하며, 민디 박사는 다른 건 몰라도 '혼자' 죽게 될 것이라 예언한다. 그리고 자기의 죽음에 대해 알려달라는 대통령에게는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브론테록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말한다. 전자의 예언은 틀리고 후자는 맞는다. 왤까?
사람의 행동은 심리적 요인, 생물학적 요인으로 환원해 설명할 수 있을지는 지금도 활발히 연구되는 주제이다. BASH는 사람의 모든 사회적, 생물학적 요소를 분석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예측하고 관리한다. BASH가 사람의 죽음을 예측한다는 것은, 사람의 행동을 심리, 생물학의 영역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논리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정해진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자유'라는 개념은 허상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BASH가 내가 내일 할 행동을 예측했고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내일 그 행동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나의 제약을 인지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선택을 내리는 것이 인간이 가진 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그 제약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정해진대로 흘러가는,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민디 박사와 대통령의 길이 갈린 것 같다. 민디 박사는 자신이 홀로 죽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자신을 지배하던 욕심과 비합리, 기만을 인지한다. 자신의 제약을 인지하게 된 그는, BASH의 예측대로 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편 브론테록에 의해 죽는다는 이야기는 (물론 알쏭달쏭하긴 했다만) 대통령이 지배당하고 있는 것들, 즉 브론테록에 의해 죽게되는 미래로 그녀를 이끌어가는 제약들을 인지하게 하지 못했다. 단지 피터 이셔웰의 예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직언이 그 기회였겠지만 그녀는 그것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정해진 최후를 맞는다.

유전자와 본능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물과 그 제약을 인지하고 벗어날 수 있는 인간. 이렇게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것 중 하나가 '자유'라면 민디 박사는 자유와 인간성을 회복했지만 대통령은 끝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은 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대통령은 죽음마저 동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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